“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 100:5)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을 너무도 익숙하게 듣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천천히 묵상해 보면 이 한 구절 안에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 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단순히 착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또한인자하심이라는 말은 은혜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죄로 인해 전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분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실하심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약속을 잊기도 하고 형편에 따라 바꾸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러지 않으십니다.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전혀 변화가 없고, 기도하지만 응답이 보이지 않으며, 상황은 오히려 더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시간들이 길어지게 되면 처음의 기대는 실망으로, 실망은 원망으로 바뀌고 어느새 마음속에는 불만과 원망이 자리를 잡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금방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과 계획대로 정탐꾼을 보내어 마치 자신의 힘으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강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할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은 원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민 13~14장, 신 1장).
돌이켜 보면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면 금방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열심히 믿으면 하나님께서 바로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더 많이 애쓰지만 현실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지쳐 가고, 하나님의 침묵에 화가 쌓여 어느 순간 원망하기에 이르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지금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괴로움과 답답함을, 말하지 못하는 속상함까지도 알고 계속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져도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상황이 변한다고 해도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비록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오늘 힘들고 괴로워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하나님을 믿는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듣고 보았던 말씀들을 기억하며 그대로 행하려고 애써보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더 힘겨워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를 향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무더위가 계속되는 요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까지 겹치면 마음은 더욱 쉽게 지치고 짜증이 납니다. 작은 일에도 화가 나고, 감사보다 불평이 먼저 나오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잠시 멈춰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떠올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를 인정해주려고 한 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어야 했던 예수님의 성실하심을...
오늘도 모든 것이 원하든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인자하심, 그리고 성실하심을 생각하며 더위로 지쳐가는 몸과 마음을 감사로 채우는 하루이기를 소망해봅니다
살아가다 보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는 날이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려 애썼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고, 원하지 않게 찾아오는 고통과 억울함, 손해와 참아내야만 하는 외로운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인가요?”라며 묻곤 합니다. 이 질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의 탄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기에 더욱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2~3)
이 말씀을 읽다 보면 한 가지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여호와’라고 거듭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유난히 눈에 들어옵니다. .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밝히신 것은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가 시작한 일은 반드시 이루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입니다.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전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사방이 막혀 있어 절망뿐이었습니다. 성은 무너지고 백성들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미래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심판의 끝이 아니라 ‘완전한 회복’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4절부터 8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때문에 흘려야 했던 눈물, 억울하게 견뎌야 했던 시간, 아무도 알아주시 않는 희생과 고통의 순간들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 지금도 부지런히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회복을 이루어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냥 주셔도 될 텐데,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시며 기도하고 싶은 마음조차 하나님께서 먼저 주시는 은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간절함을 심어 주시고, 그 간절함을 기도로 이끌어 가시며,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해 나가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신 일을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가시는 은혜의 통로인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 단순히 처한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문제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기도는 문제 해결의 도구를 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통로가 됩니다.
오늘, 어떤 문제를 손에 쥐고 낙심하고 계십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넋을 놓고 시간을 보내기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크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두커니 앉아 예배당의 딱딱한 의자만 바라보며 한숨짓기보다는 창가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합니다.
우리가 고통으로, 감사로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도내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묵히 고통을 견디는 인내심이 아니라 약속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감사로 마음을 채운다면, 우리의 잃어버린 소망을 회복시키시고, 우리가 알지도 못했던 크고 놀라운 비밀을 보여주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실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기도로 승리하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유다서 1:5)
서론: 나는 정말 안전한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은 성도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의 이 안일한 확신을 강하게 흔들어 놓습니다.
유다는 이 말씀을 통하여 출애굽의 구원을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로 들며 그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종말을 맞이했는지 기억하라고 하며 매우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홍해를 건넜으며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를 받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절기 때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으며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비참하게 멸망당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이 두려운 말씀 앞에 오늘 우리는 과연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나는 매주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 생활도 하니까 절대로 심판받지 않아!"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 중심이 변질되어 있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론
1.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우리가 흔히 “나 예수님 믿어요”“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합니다”라는 감정적인 동의나 지적인 인정 정도를 믿음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는 말씀을 통해 믿음의 본질이 올바르게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 철학이나 도덕 강연,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오직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설득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로 믿음을 뜻하는 '피스티스(πίστις)'는 신뢰와 확신이라는 기본적인 뜻을 가지지만 그 어근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득당하다'라는 뜻입니다.
참된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 의지로 노력해서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생각과 고집이 철저하게 깨어지고, 하나님께 완전히 설득당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그 절대적 사실에 압도되어 "아멘,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라고 동의하며 굴복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2. 무엇을 듣느냐가 믿음을 결정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소리, 즉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생각에 설득 당하게 되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창세기 3장의 하와가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는 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탄이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하나님이 정말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질문하며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때 하와의 마음속에 틈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설득당해 있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왜곡된 대답을 했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묘하게 변개시킨 것입니다. 하와의 마음에 틈이 있음을 확인한 사탄이 "야, 너희는 결코 죽지 않아!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오히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될 거야. 그것을 하나님도 아셔"라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다른 해석을 제공합니다. 하와가 사탄의 매혹적이고 그럴듯한 논리를 계속 귀 기울여 듣게 되자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거짓말에 완전히 설득당해 버립니다. 사탄의 말을 진리로 믿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는 즉각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열매를 보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서 그것을 따 먹고 남편도 범죄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행동의 원리, 즉 듣고 설득당함의 법칙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많이 듣고 있는 것에 설득당합니다.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우리의 믿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듣고 있는 것에 내 믿음이 결정되고, 내 행동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에 설득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 반드시 순종하게 됩니다. 반대로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은 결국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비참하게 멸망당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수많은 기적을 보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들이 믿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 설득당하지 못했기에 믿음이 생기지 않았고, 믿음이 생기지 않으니 삶 속에서 순종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으니 원망과 불평과 우상숭배가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범죄하다가 멸망의 길로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과 순종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지 아니하였다”는 표현과 "순종하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순종으로 나타나고 순종이 없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3. 왜 많은 사람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설득당하지 않는 걸까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을 때 깊이 깨달아야 진짜 살아 있는 믿음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수많은 사람이 교회 다니면서도 말씀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근본적인 이유를 요한복음 8장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43)
예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직접 선포하시고 눈앞에서 엄청난 표적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서 "와, 이분이 정말 선지자다, 메시야다" 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믿노라고 자처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이 한국어 성경에는 능력이 없어서 '들을 줄 모른다'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본래 헬라어의 뉘앙스를 살려 정확하게 읽으면 "너희가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거부하는 '의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자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 듣기를 거부하니 깨달을 수가 없고, 깨닫지 못하니 믿음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4. 가장 두려운 것은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실상과 마주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과 이사야 6장을 통하여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 비유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 명쾌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알아듣기 힘든 비유라는 형식을 빌려서 말씀하시는 이유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10~11절)라고 하시며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허락되지 않은 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이들로(13절) 마음이 완악해진 백성(15절)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완악해졌다'는 것은 마음이 굳은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즉 마음이 굳어져서 말씀이 파고들 여지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사야 6장과 대조해 보면 매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마태복음 13장의 인용구와 이사야 6장 원문의 차이점을 눈치 채셨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귀가 둔하고 눈을 감았다"라고 백성들의 상태를 기술하고 있지만, 이사야 6장에서는 "너는 가서 이 백성의 마음을 도리어 둔하게 만들고, 그들의 귀가 꽉 막히게 하며,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로 볼 때 누가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귀를 막아버리며, 눈을 멀게 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감각을 강제로 차단해 버리신 것입니까?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하도록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요한복음 8장에서는 단순하게 사람들 스스로가 마음의 귀를 닫고 듣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사야 6장과 마태복음 13장의 깊은 실상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주 두껍고 딱딱하게 만들어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게 하여 깨달음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무서운 유기의 심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교회를 다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말씀이 들리지 않고 이해가 안 되며, 복음이 감동되지 않고, 회개의 마음이 생기지도 않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의심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이해력이 떨어지나 봐"라며 가볍게 넘길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 귀를 막아버리시고, 내 눈을 멀게 하셔서, 복음의 말씀이 들리지 않도록 철저하게 차단하고 계시는 영적인 위기의 신호일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8장 12절은 마태복음의 씨 뿌리는 비유를 더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길가 밭과 같이 마음이 완악하게 굳어버린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떨어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딱딱하니 말씀이 파고들어 뿌리 내리지 못하여 이해되지 못한 채로 표면에 겉돌고 있으니 즉시 마귀가 찾아와서 그것을 통째로 빼앗아 가버립니다. 결국 말씀은 사라지고 믿음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가 왜 그렇게 다급하게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말씀에 설득당해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고 원천 차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귀가 와서 내 말씀을 빼앗아 갔다"라고 하면 마귀의 강력한 힘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마귀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말씀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마음을 굳혀 버리시고, 마귀를 허용하사 그들에게 뿌려진 은혜의 말씀을 남김없이 빼앗아 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해 파멸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는 영적 현실입니다.
5.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말씀에 설득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잔인해 보일 정도로 말씀의 길을 차단하시고 멸망의 자리로 몰고 가시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들이 끊임없이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며 악을 행하며, 경건하지 않은 삶을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경이들을 악한 자라고 하며 이 '악'은 사람을 쳐 죽이고 도둑질하는 윤리적인 죄를 말하기도 하지만, 이 보다 더 근본적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내 영혼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고,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종교적 업적을 주인 삼아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상태를 가장 근원적인 죄요 악이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유다는 이러한 경고를 주기 위해 이 편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거짓 가르침과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광야의 백성들처럼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중심으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비참한 악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지를 자랑하기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말씀에 설득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굴복하고, 그 말씀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입니다.
결론.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굳게 붙드십시오.
오늘 본문은 출애굽의 은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멸망당했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 생활을 한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변질되지 않는 우리의 중심을 살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설득당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신앙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굳게 붙들고, 광야에서 멸망한 자들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하고도 무거운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곧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통과해야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구원받은 이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과정을 반드시 지나가야 합니다.
바로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유혹과 시험, 거짓된 가르침과 영적 전쟁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서는 단순히 “예수를 믿어라”라고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을 끝까지 지켜라”라고 외치는 책입니다.
본론
1. 부르심을 받은 자는 누구인가?
유다서는 여느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수신자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유 1:1)
이들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1)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
부르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먼저 찾아오시고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구원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지혜나 결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
두 번째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는 자들 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외적인 보호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과 말씀을 끝까지 보존하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말씀을 듣긴 하지만 금세 잊어버립니다. 은혜를 받지만 어느새 식어버리고 결단을 하지만 반복해서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시고,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믿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키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말씀 안에 거하는 삶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 수 있듯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붙어 있다”와 “거한다”는 표현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귀로 듣는 지식으로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우리 생각과 삶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말씀을 빼앗으려는 세력이 있고, 말씀을 흐리게 만드는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지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빼앗기지 않는 것이며, ‘행한다’는 것은 그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다면 그 말씀과 동행하는 삶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이 “행하라”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라”는 말도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유도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고 말씀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아져야 하는 이유
유다는 2절에서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축복합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것들이 더욱 많아져야 할까요?
1) 긍휼
긍휼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21절)고 하십니다. 성도는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2) 평강
평강은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도 평강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두렵고 절망적인 순간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가운데 계셨을 때 였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강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3) 사랑
사랑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공급하시는 은혜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생명을 공급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흘러와야 우리는 믿음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때를 이길 수 있는 힘도 바로 여기에서 공급받는 것입니다.
4. 유다가 편지를 쓰게 된 이유와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의 정체
유다는 원래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대하여 쓰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즉, 구원의 은혜와 성도의 삶에 대해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3절)고 강력하게 쓰고 있습니다. 4절에서 그 이유를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고 하시며 교회 안으로 거짓된 사람들이 침투해 들어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이들을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판결이 구체적으로 어떤 판결인지 1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고 하시며 그들이 정죄받을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판결이란 하나님의 정죄,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로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삶의 결과로 심판을 받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는 자들
이들은 “구원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예수 믿었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삶의 초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구약 성경의 표현으로 바꾸면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 자들'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주인 되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 되어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1:12)이라 말하고, 에베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라고(1:7), 히브리서는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9:14)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삶의 본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욕심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만족을 추구합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기 탐욕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 이 사람을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는 모습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
그리고 두 번째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주재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런데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 외에 또 다른 주인을 섬깁니다. 돈을 섬기고, 명예를 섬기고, 자기 자신을 섬깁니다. 이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지만 삶의 중심에는 다른 주인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공적을 쌓고, 이 쌓은 것을 근거로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완성해 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인 '하나님'이 쏙 빠져버린 채 내 마음대로 종교 행위를 채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한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예배드린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예배하는 삶의 진짜 주인을 들여다보면, 예수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돈과 권력과 자기 결단이라는 '또 다른 주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신앙생활을 안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렸고, 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매일 확인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두려운 징계와 심판에 의해서 광야 흙바닥에 엎드러져 죽은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는데도 왜 멸망당했습니까? 그들의 삶이 종교적이었을지 몰라도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었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마음 깊은 곳에서 쫓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광야 40년 동안 진정으로 나를 섬겼느냐? 아니다. 너희는 나를 섬긴 것이 아니라 너희가 만든 우상을 섬겼다"라고 준엄하게 평가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수님 외에 또 다른 우상, 내가 의지해야 할 세상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선언하는데, 묘하게 예수님 외에 또 다른 조건이 있는 것처럼 말을 만들어 냅니다. "내가 이 구원의 길을 온전히 유지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해"라며 인간의 행위를 섞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버립니다. 종교적 업적 자체가 자기를 숭배하는 거대한 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유다는 바로 이러한 자들 즉 변질된 마음들, 가짜 복음들과 싸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가르침은 창세기 3장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어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왜곡하여 죄를 정당화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거부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처럼 영향력있는 지도자들이 모든 종교는 하나의 진리 안에서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이라고 하며 예수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행사에 다른 종교 지도자를 부르고 심지어 무속인까지 불러들여 굿을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찾아 가는 것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물질이 우선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 반드시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세 가지 경고
유다는 이들의 실체를 보여 주기 위해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첫 번째 심판의 원인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공동체 안에 있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둘째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두 번째 원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와 본분, 즉 하나님의 질서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세 번째 원인은 음란함입니다. 육체적 음란함뿐 아니라 하나님보다 다른 욕망을 따라가는 영적 음란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이 세 사례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실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따라가며, 다른 사람들까지도 미혹하여 같은 길로 끌어갑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들을 따라가는 자들을 "꿈꾸는 자들" “화를 당할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이 세 가지 사례를 하나 하나 정리해보므로 이 세대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결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다서의 핵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도는 단 한 번 주어진 것입니다. 변개시킬 수 없습니다. 변하지도 않습니다.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왜곡하는 가르침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는 사상과 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주인을 세우게 만드는 모든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서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경고인 동시에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키심을 받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더욱 풍성한 긍휼과 평강과 사랑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끝까지 믿음의 도를 붙들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로마서 2:13)
우리는 흔히 구약의 율법을 떠올릴 때, ‘하라’와 ‘하지 말라’로 가득한 딱딱한 규율의 목록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무거운 짐이나 삶을 옭아매는 족쇄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단순한 금지와 명령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깊은 지혜와 풍성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율법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소중한 길로 안내해 주는 것을 발견합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태도를 가르쳐줍니다. 신명기 4장 10절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을 모으시고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존중하고 순종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율법은 우리를 교훈하여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미련하여 다른 길로 들어서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의 음성과 큰 불을 통해 말씀을 들려주시며 우리를 교훈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신4:36).
바울 역시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을 통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할수록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되고 조금씩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이 땅에서의 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삶에는 반드시 약속된 열매가 따릅니다. 신명기 4장 40절의 말씀처럼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자와 그 후손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복을 받으며 한없이 오래 살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축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누리는 평안과 기쁨,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며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했을까요?
이 말씀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나 자격과 전혀 관계없는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9).
그러나 이 말씀은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달라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의롭다는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거저 받는 ‘죄 사함의 의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받는 의로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명기 6장 25절은 우리가 그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킬 때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통해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살아내는 사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말씀을 안다는 것과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삶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머릿속에만 머물 뿐입니다. 그러나 작은 말씀 하나라도 삶이 된다면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말씀을 듣고 읽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듣는 귀가 아니라 살아내는 순종의 발걸음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 성경을 읽을 때 단지 지식을 얻기 위한 독서에 머물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 마음을 삶의 작은 자리에서 살아보면 어떨까요? 쏘아붙이는 말 대신 따뜻한 격려를 건네고, 무관심 대신 사랑을 선택하며,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하는 말로 마음을 전달해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실천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듣는 것은 시작이지만행하는 것은 성숙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더욱 깊이 있게 읽고 묵상해봄으로 말씀을 듣는 것을 넘어 말씀을 살아내는 자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며 하나님께 인정받고 기쁨이 넘치는 복된 날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20)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한국인입니다. 우리의 국적은 명확해서 해외여행을 가거나 미국이나 일본 등의 다른 나라에서 생활하게 되더라도 우리의 국적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영접한 순간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명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우리의 시민권이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육신은 여전히 이 땅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이미 하늘나라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 즉 '여행자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히11:13).
여행자는 자신이 잠시 머무는 곳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이 땅의 것에만 아등바등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하늘의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크고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면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을 여행자로 살아가는 길이 항상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오해, 미움과 배척을 받기도 하고(요17:14), 뜻하지 않은 환난과 고통, 심지어 억울함과 손해, 죽음의 위협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히11:33-38). 세상의 기준과 하늘의 기준 사이에서 갈등하며 힘든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순간도 있습니다.
실제로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그런 길을 걸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현재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눈물과 애통, 고통과 사망, 그리고 아픈 이별이 없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계21:3). 이 소망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갈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영원한 천국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복을 누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8:1).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죽은 후에만 들어가는 먼 미래의 장소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에서 먼저 누릴 수 있는 실제의 삶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내 뜻과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도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믿는 것.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에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며 감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현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길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게 되고, 힘겨운 순간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자리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유난히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요즘입니다. 땀방울이 흐르는 더위 속에서도 모처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가 우리 마음을 씻어내듯 고된 이 땅의 삶 속에서 하늘의 소망이라는 시원한 바람을 마주해 보면 좋겠습니다.
비록 처한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불안과 초조함 속에 있을지라도,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의 자부심을 품고 감사함으로 오늘도 한 걸음씩 묵묵히 전진해 나가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지난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부르심을 받을 자들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으며 지키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호받고 지켜지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나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고 보호받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항하여 2절에서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며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긍휼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품어 주시는 은혜를, 평강은 성령의 내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미리 누리는 참된 안식을, 또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는 변함없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왜 이미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 은혜가 ‘더욱 많아지기를’ 간절히 구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끊임없는 공격과 유혹, 거짓 가르침 가운데서 버티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풍성하게 공급되어야만 믿음을 끝까지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변하지 않는 절대적 기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오늘 본문 3절에서 유다는 이 편지를 쓰게 된 진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입니다.
원문으로 보면 “τῇ ἅπαξ παραδοθείσῃ τοῖς ἁγίοις πίστει”(테 하팍스 파라도데이세 토이스 하기오이스 피스테이)로서, 여기 쓰인 믿음( πίστει피스테이)은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인 신앙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는 객관적인 신앙의 체계, 즉 복음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한 번으로 완전하게 맡기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복음의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내 입맛대로 바꿀 수도 없고,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수정할 수도 없으며, 내 상황에 맞춰 빼거나 더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단 한 번으로 완벽하게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믿음의 도’를 여러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는 이를 ‘그리스도의 도’라고 부르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십자가의 도’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인간적인 세력을 모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복음, 세상의 눈에는 미련해 보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인 ‘십자가의 도’를 전하러 왔다고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는 광야 교회에서 모세가 받아 우리에게 전해준 ‘생명의 도’, 즉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십계명’으로, 신명기 5장에서는 호렙산에서 살아 있는 우리와 세우신 변치 않는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 믿음의 도, 그리스도의 도, 십자가의 도, 생명의 도, 십계명, 언약 등... 이 모든 것은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가리키는 것은 동일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능력으로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짜릿한 환상이나 특별한 감정을 기준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고, 그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경험보다 말씀을 우선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앞서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의 도가 안팎으로 거센 공격과 위협을 받고 있기에, 우리에게 힘써 싸우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가만히 들어온 자들, 경건치 않은 자들의 정체
그렇다면 교회를 뒤흔들고 믿음의 도를 위협하는 싸움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4절에서 유다는 그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방탕한 것)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여러분, 의외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교회를 위협하는 자들이 외계인이나 저 바깥에 있는 불신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입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모임에 참여하며,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본질적으로‘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못 박습니다.
성경에서 경건은 단순히 종교적인 열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며,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하며 천국에 간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다는 이들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광야 세대를 예로 듭니다. 그들은 출애굽의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역사를 목격했고, 광야에서 날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았으며, 만나를 먹었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나오는 하나님의 임재와 기적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 1세대 전부다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히브리서 3장 16~19절은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힙니다.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들’이었고,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이었으며, 결론적으로 ‘믿지 아니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대놓고 "나 이제 하나님 안 믿어!" 하고 애굽으로 도망쳤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생각을 더 신뢰하고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일 때,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본문을 보면 그들은 분명히 "이 날은 여호와의 절일이다"라며,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굳게 생각하면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내팽개친 채 자기 뜻대로, 자기 좋은 대로 예배한 자들, 그들이 바로 광야에서 멸망 받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인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들이 이미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받기로 미리 기록되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이들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다는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거짓 가르침의 두 가지 특징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 침투한 이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유다는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색욕거리)’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도록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야, 우리는 예수 피로 구원을 이미 받았잖아! 그러니까 이제 우리에겐 심판이 없어. 우리 육신은 어차피 썩어 없어질 건데, 세상에서 죄 좀 짓고 내 마음대로 살아간들 그게 구원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어? 어차피 천국 가는데 내 마음대로 좀 살면 어때? 무슨 짓을 해도 주일에 와서 회개만 하면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셔!"
여러분은 속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죄 가운데 머물러도 된다는 허가증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떠나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은혜를 경험할수록 더욱 거룩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은혜를 방탕한 육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바꾸어 버리는데 이것이 아주 위험한 미혹이요 무서운 죄악이라고 경고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내가 이 땅에서 내 육신의 정욕대로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으로 프리패스 해주는 '합법적 통행증'을 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온 거짓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교묘하게 변형시켜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 되어 살아가게 만듭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흥청망청 방탕하게 살다가, 주일에 교회 와서 예배 한 번 드리고, 격동적인 찬양과 감정적인 눈물 좀 흘리고 회개하고, 헌금 열심히 내면 영생을 소유한 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이들의 삶을 향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입니다.
둘째, 이들은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여기서 ‘주재’라는 단어는 내 삶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삶의 주인이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입으로는 예수님을 부르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예수님의 주권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만들어내어 쫓아갑니다. 내 지갑의 주인, 내 시간의 주인, 내 인생의 주인이 여전히 ‘나 자신’이 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유다서 15절을 보면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며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모습이 결국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는 결국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란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는 순종입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유다가 이 편지를 쓸 때 교회 안에는 이미 이러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거짓 가르침의 모습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사단은 핍박만으로 우리의 삶의 환경을 무너뜨려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무서운 위협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씩 변질시키고 타협하게 하고 변형되는 위협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야금야금하는 타협의 메시지들이 강단과 교회 안에 들어와 위협합니다. "말씀을 문자 그대로 다 안 지켜도 돼. 시대가 바뀌었잖아. 그렇게 고집스럽게 십자가의 길을 안 걸어도 너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니까 대충 편하게 신앙생활 해." 이런 부추김이 바로 믿음의 도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공격입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변형되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멸망의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단 1%도 왜곡되거나 변형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단번에 주신 복음의 진리인 하나님의 도, 십계명과 규례와 율례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타협과 방탕의 유혹 속에서, 지금 나는 내 삶의 주권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
나는 더하거나 빼지 않은 변개되지 않은 말씀을 붙들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가?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번 한 주간, 가만히 들어오는 세상의 거짓 가르침을 믿음의 도의 말씀으로 과감히 물리치고, 거룩한 행실과 온전한 예배로 내 삶의 주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해 내는 참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마치 쉼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습니다. 아침이 오면 하루를 시작하고, 해야 할 일들을 감당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조차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순간이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해 보여도, 그 아래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과 욕심, 시기, 이기심의 흔적들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살아가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내 안에 자리한 악한 양심이 얼마나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것들을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심도 해보고, 스스로를 다잡아 보기도 하지만 결국 또다시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마치 거칠게 자라난 잡초를 작은 호미 하나로 뽑아내려는 것처럼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죄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히브리서의 말씀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소망의 빛을 비춰줍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22)
이 말씀은 먼저 '마음에 뿌림을 받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히 10:19, 벧전 1:2). 주님의 보혈은 단지 과거의 잘못을 덮어주는 일시적인 가리개가 아닙니다. 죄의 거센 유혹을 단숨에 베어낼 수 있는 힘이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오늘을 살아내는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자신의 의지로 버텨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변화가 먼저 예수님의 피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 피는 악한 양심을 깨뜨리고 하나님 앞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국 날마다 예수의 피뿌림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 힘으로는 끊어낼 수 없었던 죄의 사슬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내려놓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의 “몸이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 즉 일상의 모든 삶이 맑은 물(사 55:1)로 씻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맑은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수많은 먼지와 얼룩을 묻히게 됩니다. 생각은 흐려지고 마음도 쉽게 지칩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어느새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어야 합니다(시 1:2).
말씀은 메마른 영혼을 다시 살리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결하게 하며, 하나님 뜻을 분별하게 만듭니다(롬 12:2). 그러므로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힘도 결국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죄의 사슬을 끊어내는 정결한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걸음도 결코 내 연약한 손으로 빚어내는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뿌려짐'과 '씻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은 그 고백의 순간에 이미 완성된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미 정결함의 옷을 입었고, 그 은혜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삶이란, 깨끗해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이라기보다, 이미 내어준 은혜를 잃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움의 여정입니다.
이 거룩한 씻김의 기억을 붙들 때, 우리는 비로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참된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으로 그 지성소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자의 삶은 화려하게 타올랐다 꺼지는 단 한 번의 불꽃놀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일의 일상 속에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처럼 꾸준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씻어내는 삶에 가깝습니다.
오늘도 간절한 소망을 품고 하루라는 문을 열어봅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흔들리지만 내 삶에 붉게 새겨진 예수의 피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기를, 머리로만 아는 차가운 신앙이 아니라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삶의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깨끗하게 씻어 내는 은혜를 경험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가 침묵과 어둠 속에서 멸망할 자가 아니라, 오직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히 10:39)을 굳게 붙들고 걸어가는 복된 하루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태복음 22:37-38)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이도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거리의 음악 속에도, 드라마의 장면 속에도, 사람들의 대화 속에도 사랑은 늘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라 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며, 때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도 말합니다. 사랑은 어쩌면 이 시대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 서면 마음 한편이 조용히 멈춰 서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렴풋이 알 것 같은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또 그 사랑은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그 질문 앞에서 쉽게 답을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사랑을 막연한 감정으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는 사랑”은 단지 뜨거운 감정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 삶의 방향이며, 존재의 태도이고, 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을 뜻합니다.
먼저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 계획과 내 판단대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려 합니다. 눈앞의 상황을 붙들고 스스로 삶의 운전대를 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조용히 맡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쁠 때도, 힘들 때도,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은 어떻게 원하실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시작인 셈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가진 자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히 11:6).
또한 ‘목숨을 다하다’는 것은 내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뜻합니다. 숨을 쉬는 매 순간, 일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터와 가정,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 39장에 등장하는 요셉의 삶 속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억울하게 종이 된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주인의 유혹을 거절하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며 하나님을 의식하는 마음이 그의 삶을 지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뜻을 다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유행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이익이나 세상의 것이 기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를 고민하며 생각의 모든 방향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니엘과 세 친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제국의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제국의 관습과 방법에 자신들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마음의 중심만은 하나님께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 전체의 방향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열심만이 아니라 삶의 중심과 존재의 이유, 그리고 생각과 가치관까지 모두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계명, 즉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라고도 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요한복음 14:21)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작은 순종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사랑의 고백이 됩니다.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넘어지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려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계명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땅에서의 번성함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 소망까지 약속해 주셨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가장 안전하고 복된 길인 셈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섭니다. 거창한 일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늘 하루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려 애쓰는 삶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할지 모르겠습니다.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작은 순종 하나를 붙들며 살아가는 하루.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가장 깊은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유다서는 단 한 장으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서신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말씀 속에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가 어떠한 자세로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유다가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가 나옵니다. 본래 유다는 우리가 일반으로 얻은 구원, 즉 성도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앞으로 신앙생활 잘하십시오”하고 권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쓰려던 그 시점에 교회 안에 심각한 영적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믿음을 흔들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단순히 ‘신앙생활 잘하라’는 부드러운 권면이 아니라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절박한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순한 종교 생활도, 편안한 문화생활도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흔들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드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치열한 전쟁입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서 싸움에 나갈 만 한 자를 계수한 것과 같이 신앙의 길이 곧 전쟁의 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의 한복판에 서 있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유다는 이 편지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보낸다고 합니다. 즉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워야 하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본론
1. 부르심을 받은 자의 정체성: 사랑과 지키심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부르심을 받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내 힘으로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 전부터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불러주셨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결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이 우리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성경구절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 6절을 보면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7절을 보면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고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씀하시며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길이 되고 구원의 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할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교회 안에 들어왔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시며 부르심은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부르심을 받은 자란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부르심을 입은 자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입니다.
여기서 ‘사랑을 얻는다’라는 의미의 ἠγαπημένοις(에가페메노이스)'라는 단어는 현재분사 수동태로, 과거에 한 번 ‘사랑받았다’로 끝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공급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시며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우리의 결심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즉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부었다'는 ἐκχέω(엑케오)로 성령을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현재까지 충만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부터 16절에서도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며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신다“고 하시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내 힘이나 노력으로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계속해서 부어지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유튜브나 TV를 통해서, 그리고 친구나 모르는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 성령께서 그 들은 것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랑을 알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사랑을 얻는다'라는 표현의 진짜 의미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입니다.
성경은 또한 부르심을 받은 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 지키심을 받는다의 τετηρημένοις(테테레메노이스) 또한 현재분사 수동태로 사용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보호와 지키심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믿음을 지켜야 한다’‘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며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면 내가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나에게 공급되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지키심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과 2절에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깨끗케 하신다는 것은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손질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다듬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손질하며 다듬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키심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얻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서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이유도 우리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농부되신 하나님께서 손질하시고 보호하시며 열매 맺도록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키심을 받는 삶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14절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청함을 받았다’라는 단어인 'κλητοὶ(크레토이)는 유다서 1절의 '부르심을 받았다'와 같은 어원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볼 때, 많은 사람이 잔치에 부름(청함)을 받았지만 그들 모두가 택함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즉, 입술로 예수를 고백하여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을지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지키심 속에 머물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택함 받은 자는 적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서도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예수님과 더불어 싸우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이기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도 이기게 되는데 그들은 바로 “부르심을 받고 빼내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입니다. 여기서도 마태복음 22장 14절의 ‘택함을 받았다’와 요한계시록 17장 14절 ‘빼내심을 받았다’는 단어 또한 ἐκλεκτοί(에클레크토이)로 같은 어원입니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란,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예수를 주라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키심 속에 끝까지 머물러 마지막 날에 주님과 함께 최종 승리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2. 가만히 들어온 자들과 광야의 멸망
그런데 문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공급과 지키심의 끈이 중간에 끊어지게 된다면 부르심의 대열에서 탈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14절에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것과 요한계시록 17장 14절의 예수님을 고백했어도 빼내심(택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입술로 고백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지키심 속에 머무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도 마지막 때에 어린양과 함께 이길 수 없는 탈락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서 4절은 이러한 부르심 속에서 성도를 탈락하게 만드는 존재들이 누구인지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고 하시며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이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으니, 이제 우리 마음대로 우리 뜻대로 살아도 된다“며 하나님의 은혜를 조롱거리고 만들게 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이단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17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마지막 기도가 나옵니다. 11절에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었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시면서 하나님께 그들이 계속해서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머물 수 있도록 보전해 달라고 구하십니다. 12절에서도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켰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3년 동안도 그들을 보전하고 지켰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악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5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악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을 보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하시며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려는 것이 악이라고 하십니다.
19절에는 조금 다르게 표현했든데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는 악을 하나님을 버리고 경외함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경외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스스로의 의지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악은 죄를 짓는다는 개념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악이라고만 한다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이 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고린도전서 10장에 기록된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1절부터 보면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출애굽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라고 춤추며 구원을 노래했던 사람들이고, 오늘날로 치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5절에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 하시며 다수가 멸망받았다고 하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그들의 다수'는 수치상으로 볼 때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장정만 60만명, 전체 인구를 약 250만에서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그 수 많은 사람들이 나왔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와 1세대의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멸망당하고 죽었습니다. 심지어 모세와 아론까지도 죽었습니다. 물론 자연사한 사람들도 있었기에 성경은 ‘다수’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6절에보면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며 하나님께 악을 행하다가 광야에서 비참하게 멸망당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신명기 34장에서는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긴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멸망으로 몰아갔던 악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그 구체적인 모습이 7절부터 나옵니다.
첫째는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7절)고 하시며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거부하고 다른 것을 채워 넣은 우상 숭배의 악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라”(8절)고 하시며 하나님이 은혜를 육신의 쾌락과 색욕거리로 바꾸어 버린 음행의 악입니다.
세 번째는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라”(9절)고 하시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악입니다.
네 번째는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10절)고 하시며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거역하고 입술로 불평을 쏟아내는 원망하는 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경외하지 않는 이 네 가지 악, 즉 우상 숭배, 음행, 시험, 원망에서 보전되어야만 이 말세를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시면서, 자신을 따랐던 제자들과 앞으로 자신을 믿게 될 사람들을 보전해 달라고 하셨을 때 육의 보전만을 구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악에 빠지면 고린도전서 10장의 광야에서 멸망 받은 사람처럼, 또한 요한계시록 17장의 어린 양과 함께 이기는 자가 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악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고 부르심의 대열에서 탈락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본보기라고 말씀합니다.
3. 악에서 보전받는 유일한 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 비참한 광야의 멸망을 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남겨질 성도들을 위해 쏟아내신 마지막 기도가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평안하게 잘 먹고 잘사는 조건을 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와 음행과 시험과 원망이라는 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고’ 목놓아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두려워하여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이 기도의 응답으로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부어주셔서 마르지 않고 넘쳐흐르면 이 험한 말세를 이기게 되고, 악에 빠지지 않고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단순히 감정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 말씀대로 내 육신을 쳐서 순종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우상숭배를 버릴 수 있게 되고, 음행을 멀리할 수 있으며, 주를 시험하지 않게 되고, 원망 대신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습다. 그것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있으므로 끊임없이 영양분과 사랑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삶의 모든 시련과 환경이 합력하여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여 방종에 빠지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육신의 정욕의 기회로 삼는 자는 광야의 다수처럼 탈락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무릎을 꿇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끝까지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에 선포된 말씀처럼, 마지막 날에 어린 양과 함께 서서 최종 승리를 거두는 ‘부르심을 받고 빼내심을 얻은 진실한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